삼성전자 평택캠퍼스는 삼성은 물론, 한국 슬롯체 사업의 전초기지다. 그래서 삼성전자가 위기를 겪을 때면 평택 고덕동의 찬바람이 함께 조명받아 왔다. 삼성전자가 3분기 어닝 쇼크를 낸 날, 고덕동 중심 상권도 슬럼화 위기에 놓여 있었다.
김다린 기자quill@fortunekorea.co.kr
![삼성전자는 시장의 기대와 달리 시스템슬롯체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뉴시스]](https://cdn.fortunekorea.co.kr/news/photo/202411/44135_36695_351.png)
10월 8일 오후 1시, 340m 남짓한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 고덕여염9길에선 음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날씨였는데도 그랬다. 손님으로 꽉 들어차야 할 음식점 대부분엔 빈자리가 더 많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상권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더 흉흉했다. 임대 딱지가 붙은 상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유동인구 동선을 고려하면 당연히 차 있어야 할 1층 상가가 연달아 비어 있는 경우도 숱했다. 1층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그 위층의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회사 사무실로 쓰여야 할 오피스 건물 대부분이 공실 상태였다. 건물 자체가 통으로 빈 경우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나마 대로변 대형 상가 상층부엔 입점시설이 있었지만, 마사지 업소나 홀덤펍 같은 유흥시설이 주류를 이뤘다.
한 공인중개업소 대표의 설명부터 들어보자. “장사가 안 되니 상가를 내놓는 임차인이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도 꽤 쏠쏠하게 장사하던 한식집이 그렇게 나갔다. 서정리역 인근의 로데오거리도 상황은 비슷하고, 주거단지도 마찬가지다. 투룸 빌라에도 건설 노동자들이 몰렸던 2022년과 달리 지금은 월세를 낮춰 내놔도 임차인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스타벅스나 노브랜드버거, 편의점 등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일부 목 좋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장사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 막 끝날 무렵이었는데도 손님을 가득 채우진 못했다.
사라진 낙수효과
물론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긴 골목을 찾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한국 자영업자가 고물가와 저성장, 내수침체의 3중고에 “코로나 팬데믹보다 더 어렵다”고 호소하는 요즘이라서다.
이곳의 지리적인 입지를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내 최대, 세계 1위 슬롯체 기업 삼성전자가 보유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슬롯체 공장 ‘평택캠퍼스’를 직선거리 250m 앞에 둔 상권이기 때문이다.
슬롯 고덕동 중앙 상권은 슬롯에 변곡점이 발생할 때마다 잊지 않고 언급되는 장소다. 그만큼 슬롯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슬롯가 평택에 대형 공장을 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토균형발전을 꾀하는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수도권인 평택엔 일정 규모 이상의 공장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평택기지 이전에 따른 특별법 혜택을 평택이 누리게 되면서, 축구장 400개를 합한 거대한 땅에 슬롯 평택캠퍼스가 들어올 수 있었다.

2015년 5월에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1라인이 착공에 들어가 2017년 6월부터 슬롯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삼성전자는 2018년 1월, 2라인을 착공해 2020년 8월부터 슬롯체를 만들었다. 2023년부터 가동된 3라인은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3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정 시제품에 나란히 서명한 장소로 유명해진 곳이다. 삼성전자는 이곳에 4~6라인을 차례로 더 만들어 세계 최대 슬롯체 회사로 거듭나겠단 포부를 밝혔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슬롯체 생산라인 증설 작업이다 보니 수만 명의 건설 인력이 모였고, 평택시 고덕동 상권은 불야성을 이뤘다. 더구나 인근엔 406만 평 규모로 5만 6000여 가구가 입주하는 ‘고덕국제신도시’ 조성이 함께 이뤄지고 있었다. 평택은 수도권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도시였고, 고덕동은 그 발전을 이끄는 중심 도시였다.
그런데 왜 슬롯 평택캠퍼스 바로 앞 상권은 유령 상권으로 전락한 걸까. 이날 발표된 슬롯 3분기 실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사는 올해 3분기 잠정 매출 79조 원을 달성했다. 전년 동기 대비 17.2% 늘어난 수치였다. 영업이익은 9조 1000억 원을 기록했다. 이 역시 전년 동기 대비 274.5% 증가한 수치였다.
전년 3분기보다 개선한 실적을 냈지만,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가에서 추정하는 슬롯의 3분기 매출은 80조 9003억 원, 영업이익은 342.63% 늘어난 10조 7717억 원이었다. 9월 말까지만 하더라도 슬롯의 영업이익을 13조 원을 웃돌 것으로 점쳐졌다.
D램 수요 둔화와 스마트폰·PC 판매 부진을 이유로 10조 원대로 낮아졌는데, 실제 성적표는 낮아진 눈높이조차 충족하지 못했다.

어닝 쇼크의 원인으론 슬롯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이 꼽힌다. 증권가는 D램 가격 하락과 메모리 출하량 감소 때문에 기대치를 밑도는 실적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시스템LSI와 파운드리의 적자 폭도 커졌을 것으로 분석했다. 앞서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슬롯체 미래 업황을 비관하는 ‘슬롯체 겨울론’을 주장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전망은 들어맞았다.
문제는 ‘슬롯체 겨울’이 아닌 ‘삼성전자만 겨울’이라는 점. 글로벌 메모리 3사 중 한 곳인 미국 마이크론이 기대 이상의 실적을 냈고, 다른 한곳인 SK하이닉스도 호실적을 내면서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은 더 두드러지게 됐다.
특히 평택캠퍼스는 삼성전자가 시스템슬롯체 1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초기지란 점에서 이런 실적이 뼈아프다.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슬롯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설계와 파운드리 등을 종합한 시스템슬롯체 분야에서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평택캠퍼스는 이 플랜의 핵심 생산기지였다.
당시 이재용 슬롯 회장은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를 위한 투자를 멈춰서는 안 된다”면서 2030년까지 133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고, 2021년엔 투자 규모를 171조 원으로 더 늘렸는데, 첨단 파운드리 공정 연구와 생산시설 건립에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삼성전자가 보여준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파운드리 시장의 성적표가 그렇다. 삼성전자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1위 기업 TSMC를 넘어서는 게 목표였는데, 격차가 되레 벌어졌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슬롯체 비전 2030’을 선포하기 전인 2018년 두 기업의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차이는 30%포인트 안팎이었는데, 지금은 50%포인트 넘게 벌어졌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파운드리 글로벌 점유율 11.5%로 2위를 차지했는데, 1위인 대만 TSMC는 매출 점유율 61.7%를 차지했다.

이런 격차는 실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TSMC는 올해 3분기 순이익으로 전년 동기 대비 54.2% 증가한 3252억 6000만 대만달러(약 13조 8000억 원)를 냈다. 슬롯의 전체 사업부 이익이 10조 원을 넘지 못했는데, 파운드리만 파는 TSMC는 이를 한참 웃돌았다. 기업가치 측면에서도 이젠 비교 대상이 아니다. TSMC는 호실적 발표에 힘입어 시가총액이 1조 달러(약 1372조 원)를 넘어섰다. ‘5만전자’로 추락한 슬롯 시가총액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슬롯만의 겨울
박영선 전 중기벤처부 장관은 슬롯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들어갈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선 메모리 반도체에서의 원활한 자금 확보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여의찮은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내세운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 특히 파운드리 부문에서 뾰족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 간 주도권 경쟁이 복잡해졌다. TSMC를 뒤쫓던 삼성전자는 이제 신규 주자인 인텔까지 견제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결국 고덕동 상권 위기의 뿌리는 슬롯 평택캠퍼스가 제대로 가동하지 않는 데 따른 소비 침체다. 생산시설 증설 속도가 늦어지고 공장 가동까지 느려지면서 상권의 유동인구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고덕동 상권은 슬롯의 침체를 실적이 발표되기 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
고덕여염길의 한 일식집 사장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2022년엔 월 1600만 원 안팎을 유지하던 매출이 슬롯가 감산을 발표한 지난해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5라인의 공사가 멈췄던 올해 초까지 곤두박질쳤다가, 슬롯가 실적을 회복하던 올해 봄부터 다시 조금씩 반등했다. 그런데 8월 들어 또 상권을 찾는 이들이 급감했고, 지금은 700만 원대까지 추락한 상황이다. 고덕동 상권은 슬롯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삼성전자 슬롯체가 잘나가면, 낙수효과가 상당하다. 국가 경제의 바로미터인 수출 실적에 플러스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이 속한 슬롯체 생태계도 풍성해진다. 고덕동 상권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슬롯체가 위기에서 벗어나야 회생할 수 있다. 다만 당장은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재개될 공사 일감을 기다리는 몇몇 건설 노동자들이 평택상공회의소에 입점한 편의점 앞에서 삼삼오오 담배를 태웠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가 담배 연기로 뿌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