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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의 CEO 여가] 뱃놀이, 축제가 된 고급스러운 놀이

  • 슬롯사이트입력 2022.12.16 07:00
  • 기자명슬롯사이트
김준근 . [자료=한국세시풍속사전]
김준근 . [자료=한국세시풍속사전]

한국인의 뱃놀이는 주로 큰 강인 대동강, 한강, 낙동강 등지에서 많이 행해졌고,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사가 있다. 고려의 임금들은 대동강에서 자주 뱃놀이를 즐겼다.

작은 하천에서의 뱃놀이도 여가로서의 놀이였지만, 큰 강에서 벌이는 뱃놀이는 군주와 신하, 양반과 백성 모두 즐기고 구경할 수 있는 장관이었다. 뱃놀이는 ‘선유(船遊)’ 혹은 ‘주유(舟遊)’라고 하며 옛사람에게는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놀이였다. 야간에는 불꽃놀이와 함께 축제처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강처럼 양안에 2000만 가까운 사람이 살고, 서울 한 도시만 따져보아도 1000만이 향유하는 바다 같은 강은 없다. 영국의 템즈강, 프랑스의 센느강은 한강에 비하면 동네 하천 정도에 불과하다. 요즘은 남한강과 북한강에 여러 개의 댐이 건설되어 상류와 하류를 배로 다닐 수 없게 되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물류의 중심선이었으며 유람의 천국이기도 했다.

구한말 조선을 탐방한 영국의 비숍 여사(1831~1904)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보면 한강을 거슬러 단양수계까지 유람한 기록이 있는데, 물이 적어 바닥이 드러난 여울에서는 말과 인부들이 배를 끌어가면서 상류로 올라갔다. 적어도 남한강은 서해바다부터 단양까지 배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한강이 흐르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의 수돗물은 거의 모두 한강에서 온다. 수원지인 탓에 최근까지 환경오염 문제가 발생하여 강주변에 음식점이나 위락시설을 만들 수 없으며, 주거용 주택도 엄격한 허가를 득해야만 했다. 남한강의 경우 충주댐 나루터에서 출발하는 관광용 유람선이 댐의 위아래를 왕복하는 정도로 운행되곤 했다.

그런데 최근 전기배터리, 수소발전엔진 등이 개발되고 저공해 내지 무공해 유람선을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특히 북한강계에서는 유람선 복원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는 것 같다.

남한강은 평소 유속이 느리고 강폭이 넓어서 노 저어 거슬러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그래도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니 사공들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서울 마포나루나 광나루 등에서 출발하여 최종 목적지인 충주 목계까지 경관 좋은 곳에 일종의 휴게소를 두었다.

양주, 여주, 이천, 충주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뱃사공들은 이를 일휴정(一休亭), 이휴정(二休亭), 삼휴정(三休亭), 사휴정(四休亭)이라 불렀다. 요즘식으로 하자면 제1휴게소, 제2휴게소 정도가 될 것이다. 새벽에 출발하면 이틀이면 거의 당도하는 거리이다. 사공이야 힘들지만 유람객은 즐겁기 그지 없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런 유람을 즐기면서 시를 남기고 그림을 남겼다. 북한강은 비교적 폭이 좁고 유속이 빨라 상대적으로 힘든 코스였지만, 볼거리가 많아 북한강 유람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이 모두 즐길거리, 볼거리가 그득하지만, 천년도시 한양의 번화한 강줄기로 바로 넘어가 서울 한강의 선상 유람을 살펴보자.

김홍도 '평양감사 향연도 중 월야선유도(平壤監司 饗宴圖 中 月夜船遊圖)' 일부 확대.
김홍도 '평양감사 향연도 중 월야선유도(平壤監司 饗宴圖 中 月夜船遊圖)' 일부 확대.

조선 초기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한양의 아름다운 정경 열 곳을 읊은 한도십영(漢都十詠)에도 ‘마포범주(麻布泛舟)’가 포함되어 있다. 마포에서 뱃놀이하는 정경을 한양의 10경 중 하나로 뽑은 것이다.

명나라의 예겸(倪謙, 1415~1479)은 세종 때 처음 사신으로 와서 신숙주, 성상문 등과 한강 뱃놀이를 한 적이 있고, 문종 때도 사신으로 왔으며, 성종 때도 사신으로 온 그야말로 조선통이었다. 성종 때 왔을 때는 강남구에 있던 조선 전기의 권신 한명회의 별서를 ‘압구정(狎鷗亭)’이라고 명명하고 <압구정기(狎鷗亭記)를 지어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한명회가 “부귀공명을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의미로 작명한 것이니, 그 인물됨이 좀 의심스럽긴 하다.

세조와 예종, 성종을 거쳐 당대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에,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전한다. 예겸이 압구정이라는 별호를 지은 뒤 성종(成宗)은 압구정 시를 지어 하사했는데, 이를 차운하여 조정의 신하들과 중국의 고관들이 수백 편의 시를 지었다. 한명회는 이 압구정이라는 정자 때문에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지만, 오늘날 서울에서도 유명인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아마 이때 이미 예비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겸의 글에 한강에서 뱃놀이하며 여흥을 즐기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날이 따스하니 일엽편주 가벼이 뜨고(日暖扁舟輕泛泛),
바람 잔잔하니 새 물결 가늘게 띠를 이루네(風微新水細粼粼).
바다 어귀에서 은하수 가까이 닿을 듯(海門近接銀潢派),
뗏목 타고 나루터가 어덴지 묻고 싶구나(擬欲乘槎一問津).”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천정.

이 외에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뱃놀이로는 진주 남강 촉석루 아래에서 하는 뱃놀이,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 청풍호에서의 뱃놀이, 낙동강변 안동 하회마을에서 불꽃놀이와 함께하는 뱃놀이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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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슬롯사이트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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