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은슬롯 꽁 머니 매거진 2022년 10월호에 게재돼 있습니다.
여가란 사전적 의미로는 휴식을 겸한 다양한 취미 활동이 포함되는 경제활동 이외의 시간으로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말한다. 한자로는 ‘餘暇’라고 쓰는데 ‘남는 겨를’, ‘여유의 짬’이라는 뜻을 지닌다.
과거 전통사회의 여가 활동은 현대사회와 많은 차이가 있다. 사회구조가 다르고 신분계층이 다르고, 문화예술이 다르기 때문에 여가라고 느끼는 활동이 현대인과 다를 수 있다. 선인들의 글과 그림, 역사 문헌 등에 나타나는 여가 활동을 정리해보면, 기예, 풍속, 유흥, 오락, 자기계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중 오락은 대체로 구경하기가 주를 이룬다. 구경하는 대상도 여러 가지다. 꽃 구경, 달 구경, 물 구경, 사람 구경, 놀이 구경 등이 있다. 오늘날의 윈도우 쇼핑, 미술관 관람 등이 같은 류가 될 것이다. 구경 자체가 여가이자 힐링이 될 수 있다.
막 추석 명절을 쇘다. ‘추석(秋夕)’, 곧 가을의 저녁은 어떻게 우리나라 대표 명절이 되었을까. 추석은 중추절, 가배, 한가위라고도 한다. 요맘때가 한해 농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가장 풍성한 때이다. 게다가 한해 중에 가을의 저녁 곧 추석날의 달이 가장 둥글고 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 6부의 여자들을 둘로 편을 나누어 두 왕녀가 거느리고 7월 기망(열엿새)부터 한달간 매일 뜰에 모여 밤늦도록 베를 짜게 했으며, 8월 보름이 되면 그 성적을 가려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이때 〈회소곡(會蘇曲)〉이라는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는데 이를 ‘가배’라고 불렀다. 고려 때도 추석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518년(중종 13)에는 설, 단오와 함께 3대 명절로 정해지기도 했다.
조선 초기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강희맹·서거정·이승소·성임 등과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한양의 아름다운 정경 열 곳을 읊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그 시를 한도십영(漢都十詠) 또는 경도십영(京都十詠)이라고 한다. 이들이 노래한 열 곳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로 스님들 찾아오는 정경
제천완월(濟川翫月) 제천정에서 구경하는 달의 정경
반송송객(盤松送客) 반송방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정경
양화답설(楊花踏雪) 양화진에서 눈 밟는 정경
목멱상화(木覓賞花) 남산에서 꽃구경하는 정경
전교심방(箭郊尋芳) 살곶이벌에서 봄날 꽃구경하는 정경
마포범주(麻布泛舟) 마포강에서 뱃놀이하는 정경
흥덕상화(興德賞花) 흥덕사에서 감상하는 연꽃 정경
종가관등(鐘街觀燈) 종로에서 사월초파일 연등축제 정경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 낚시하는 정경
보다시피 한도십영은 한양에서 구경하기 좋은 장소와 거리를 노래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제천정에서의 달구경이 떠올랐다.
한도십영에 등장하는 제천정(濟川亭)은 용산구 한남동 한강 북쪽 언덕에 있던 조선왕실 소유의 정자였다. 한양의 팔경이니 십경이니 하는 경승지가 많지만, 제천정을 꼽은 것은 이 월산대군의 한도십영밖에 없다. 소수의 취향이라서가 아니라 아마도 왕실 소유의 정자이고, 주로 왕족과 공신, 그리고 중국사신 정도나 되어야 누릴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천정은 ‘제천완월(濟川翫月)’, 곧 달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광희문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레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이 정자는 고려 때 지어진 것인데 조선 초기까지 한강정 또는 한강루로 불리다가 1456년(세조 2) 제천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곳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은 명나라에 돌아가서도 이곳의 풍취를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후 사신으로 오는 명나라 사신들은 으레 제천정을 방문하여 뱃놀이하고 달구경하는 것을 일정에 포함시킬 정도였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왜국에서 오는 사신들도 욕망하는 여가였지만, 그들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가을 저녁의 달구경의 여가는 시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월산대군은 시조에도 명작을 남겼다. <추강에 밤이 드니라는 시조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사실 왕위계승 1순위자였지만, 한명회의 계략으로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고, 풍류를 즐기면서 35세의 짧은 여생을 보낸 낭만적인 왕족이었다. 그는 ‘달의 산’ 곧 월산(月山)이라는 이름으로 책봉되었고, 호도 풍월정(風月亭)이라 하였다.
추석날의 달빛을 보며 월산대군이 그리워지는 것은 대군처럼 욕심을 버리고 미움을 떨쳐내며 정성으로 나라를 아낀 그의 낭만을 현 정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