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단 200년 역사의 슬롯 잭팟을 즐겨 찾는다. 아티스트들의 연주 목록도 대동소이.지휘자 진솔은 슬롯 잭팟너머의 슬롯 잭팟을 모색한다.게임사를 찾고,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어렸을 때 보고 즐긴 걸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예술 행위”라고 말했다.
진행박형진 브리즘 대표사진최근우
정리문상덕 기자mosadu@fortunekorea.co.kr

●진솔 지휘자한예종에서 지휘를 전공,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바덴바덴 필하모니, KBS교향악단 등을 지휘했다. 현재 서브컬처 공연 전문 제작사 ‘플래직'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을, 한예종에선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1995년의 일본은 소란했다.
그해 1월 고베 대지진으로 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0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신에바’)이 나왔다. 신지, 레이, 그리고 아스카. 14세밖에 되지 않은 주인공 세 명이 ‘에바’(에반게리온)에 올라타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물체와 싸운다. 이들은 ‘인류 구원’이란 명분을 내건 어른들에게 전투를 요구받는다. 생사를 오가면서 이들은 내면의 존재 불안, 애정 결핍, 인정 욕구와 싸운다. 세기말, 신에바 극장판이 내건 문구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는 기성세대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신에바는, 상업적 흥행을 넘어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관을 바꿨단 평가를 받는다.
그해 일본의 한 잡지에서 캐릭터 인기투표(‘애니메이션 그랑프리’)를 치렀다. 레이가 1위, 아스카가 3위였다. 다음 해에도 인기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25년 뒤인 2020년, 방송사 NHK에서 주최한 인기투표 기획인 ‘에반게리온 대투표’에서는 아스카가 1위, 레이가 3위였다.
지휘자 진솔은 중학생 때 신에바를 처음 접했다. 그 무렵 인기투표처럼, 그는 레이를 좋아했다. 외모가 좋았다. 성격이 괴팍한 아스카는 싫었다. 하지만 서른 넘어 다시 만난 아스카는 달랐다고 한다. 역시 그 무렵 인기투표처럼. 그는 아스카에게서 자기 자신을 봤다고 말했다.
“죽을 만큼 노력해요. 인정 받으려고요.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잘난 척 해요. 아스카는 마지막 결전에서 (에바에 깃든) 어머니의 영혼을 느껴요. 무기력하던 아스카는 ‘엄마가 보고 있는데 질 순 없어!’라고 소리칩니다. 사랑받지 못한, 그리고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 성격이 비뚤어졌지만, 애정결핍인 거예요. 그 모습에서 어린 날의 저를 봤어요. 그 무렵의 저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제가 어떤 환경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질 못했죠.”
진솔은 6월 20~21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콘서트 ‘에반게리온 윈드 심포니 2025 인 서울’의 지휘를 맡았다. 시리즈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행사다. 그는 “(아스카의) 마음과 함께한다, (제가) 머리는 짧아서 어쩔 수 없지만…”이라고 말했다.
(※진솔은 인터뷰 이후인 7월에도 두 건의 애니메이션 기반 공연을 지휘한다. 12일여의도 KBS홀에서 〈기동전사 건담 시드 프리덤〉 시리즈를 주제로 한 오케스트라 콘서트〈기동전사 건담 시드 프리덤 시네마 콘서트 in Seoul〉을, 26~27일에는 같은 곳에서 세계 최초 공식 디지몬 오케스트라 콘서트인〈디지몬 심포니: 선택받은 아이들 (Encore)〉에서 지휘를 맡았다. 연주는 플래직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맡았다.)

경영자적 지휘자
인터뷰에 앞서 촬영을 진행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4악장, 말러 교향곡 3번 1악장의 강한선율을 배경 음악으로 택했다. 2시간여 촬영 내내그는 지휘봉 끝에 격정을 실었다.
Q 지휘할 때의자아와 일상의 자아를 분리하는 편인가요?
분리한다기보다, 일상에서 못 보여드리는 모습을 모두 끌어옵니다.지휘할 때 저는 작곡가와 대화한다고 생각해요. ‘작곡가는 어떤 마음으로 곡을 만들었을까?’ 그 마음을 알아가려고 합니다. 제 방식대로 해석해 가면서 교집합을 만들어 가요. 작곡가가 느꼈을 감정과 제 감정이 겹치는 지점을 찾아갑니다. 구스타프 말러와 저의 컬래버레이션인 거죠.
Q 그렇게 분석하고 나면, 연주자들과 합을 충분히 맞춰야 온전히 표현될 텐데.
마음에 안 들어도 넘어간 적이 있는데, 최근엔 그런 적 없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죠. 다 같이 잘해보려고 했는데 음이탈이 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연주자가 음이탈을 낼 확률이 경험적으로 40%예요. 이때 제가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라서 확률은 늘기도, 줄기도 해요.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에너지를 받으면, 확률이 늘더라도 그쪽에 투자해요. 안전하게 가는 쪽을 택하기도 하죠. 일단 음이탈이 나면, 모두가 영향을 받아요. 호흡이 뜨고, ‘이 부분 이렇게 가는 게 맞나?’ 괜히 걱정이 들어요. 그러면 또 음이탈이 나기 쉽죠. 그럴 때는 제가 강하게 확신을 줘요. ‘아니야, 괜찮아.’ 무아지경에 들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계산을 계속 합니다.
Q 지휘자의 언어, 기업인의 언어를 함께 쓰네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경영자적 지휘자라고 말하기엔 부족해요. 돈보다는 제 소신에 따라 기획하거든요. 어떤 분께선 제가 하는 일이 예술 경영보단 예술 철학에 가깝다고 하셨어요.
그가 시도하는 음악은 전형적인 슬롯 잭팟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반게리온 말고도, 여러 애니메이션과 게임 음악을 섭렵했다. 10여 년 전 비상설 앙상블(합주 단체) ‘아르티제’를 창단,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말러리안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화제를 낳았다. 또 서브 컬처 전문 공연 플랫폼 ‘플래직’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리그 오브 레전드’ ‘스타크래프트’ ‘가디언 테일즈’ ‘라그나로크 온라인’ ‘시드 마이어의 문명’ ‘명일방주’ 등 게임과 ‘포켓몬스터’ ‘디지몬’ 등 애니메이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획했다.
그는 보통 먼저 공연을 제안하는 편이라고 했다. 게임사 그라비티에서 만든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예로 들었다. 그는 “중학교 때 가출하고 나서 했던 게임”이라고 돌이켰다.
“그라비티 사무실에 우리 직원들과 갔어요. 4년 전이었어요. ‘웬 젊은 여자가 왔나?’라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회의실 이름을 게임 속 마을 이름으로 지어 놨더라고요. 반가워서 게임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말했죠. 그런데 역사가 깊은 게임이라, 개발 당시부터 있던 분은 없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보다 당신이 더 덕후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인연으로 공연을 맡게 됐죠. 이후에는 월드 투어도 하고요.”

슬롯 잭팟의 첨단
Q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어요. 다른 시도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렸을 때 보고 즐긴 걸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예술적 행위라고 생각해요. 제 전공과 게임 음악을 접목하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Q 어릴 적 경험이라면.
<포가튼 사가라는 게임이 있었어요. 여섯 혹은 일곱 살에 접했어요. 플레이어 캐릭터를 생성할 때, 게임이 제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요. 그걸 갖고 캐릭터를 정해줍니다. 그게 신기해서 캐릭터 생성만 여러 번 해봤습니다. 도스 게임도 좋아했고요. 비디오 가게에서 <요술공주 샐리 <란마 1/2 <시간탐험대 <세일러문 <천사소녀 네티 같은 애니메이션을 빌려 봤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어릴 적 저는 ‘마법소녀 그려주는 친구’로 통했어요.
Q 그중 음악이 가장 좋았던 작품이 있다면.
장르가 다 달라서요. 예를 들면 <리그 오브 레전드는 록 음악을 써요. <스타크래프트는 미국 밴드 음악을 쓰고요.
사실 저도 몰랐던 게 있어요. 게임 음악 카테고리를 록, 밴드, EDM, 에픽, 클래시컬 스타일로 나눴어요. 그런데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진이 모여서 만든 앙상블 ‘필하모닉스’가 있어요. 가끔 방한해서 연주해요. 자작곡도 선보이고요. 그런데 한 사람이 자기는 북유럽 출신이라, 그쪽 스타일로 작곡했다고 해요. 세 곡을 들려주는데 다 게임 음악인 거예요. ‘아, 내가 생각하던 게임 음악의 슬롯 잭팟적 요소는 발틱 스타일이구나.’ 북유럽 신화의 고향이잖아요. RPG 장르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게 많으니까요.
Q 이렇게 다른 시도를 하는 걸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먼저 가면 길이 된다고 하죠. 아무도 안 가봤으니 예술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 거예요. 실제로 문화예술의 정의는 나라마다 달라요. 2022년 게임과 애니메이션, 뮤지컬이 문화예술 범주로 들어왔어요(문화예술진흥법 개정). 한국에서 패션은 예술이 아니지만, 또 다른 나라에선 예술이에요.
그리고 슬롯 잭팟도 고정된 음악이 아니에요. 시대를 크게 중세 및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로 구분해요. 바로크 시대 성악가는 지금처럼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당시는 극장이 아니라 살롱이 무대였죠. 30명 안팎의 귀족을 관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평민이 관객이 되면서 1000석을 채울 수 있는 소리를 내게 됐어요. 게다가 우리가 흔히 아는 슬롯 잭팟 음악은 고전과 낭만, 딱 200년 역사예요. 그걸 하나의 슬롯 잭팟 음악으로 퉁 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 (음악의 흐름은) 미국으로 갔어요. 유럽인과 흑인, 아시아인까지 미국에서 섞였습니다. 그게 팝이 됐고, 그 에너지가 뉴올리언스에서 폭발했어요. 그때는 녹음이 3분까지만 가능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3분짜리 음악이 주류인 거예요. 이때 수십 분짜리 슬롯 잭팟 음악은 진입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지금은 1분 안쪽의 쇼츠가 나오고 있죠. 하나의 흐름이에요.
그런데 1700~1900년 사이에 나온 음악만 공부해서 그것만 평생 연주하는 게 맞는 걸까요?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 세대가 제 세대예요. ‘우리 예술은 원래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 눈치보지 말고, 세상을 더 넓게 보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젊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어요.

‘우리 예술은 원래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 눈치보지 말고, 세상을 더 넓게 보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5년 정도 걸릴 거예요”
Q 부모님 두 분 모두 음악인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업계 현실을 어렴풋이 봤어요. 제자분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요. 좋은 학교, 유학, 학위 취득.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와서 자리 잡기 어려워요. 가방 끈이 기니까 패배감도 커져요. 그걸 봤기 때문에 제가 뭔가 해야겠다고 더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Q ‘우리가 아는 슬롯 잭팟은 없다’, 이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슬롯 잭팟 음악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길 바라는 겁니다. 새로운 걸 해 보면 재밌잖아요. 그리고 젊은 사람도 악단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레퍼토리가 있어야 해요. 제가 아까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에 맞춰 지휘했어요. 연주자들에겐 익숙한 곡이죠. 베테랑 분들은 ‘이건 이렇게 해’라고 말씀하실 거고요. 그런데 때로는 ‘나는 이 곡 잘 모르는데, 네가 한 번 해 봐’라는 곡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Q 2021년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롤)’ 배경음악을 소재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셨죠. 슬롯 잭팟 음악계에서도 상징적인 극장이죠. 이곳이 코스튬플레이어, 굿즈로 채워졌어요. 그러니까 오케스트라와 거리가 멀던 20대 남성들이 몰렸고요. 제작진 말로는, 어떤 관객은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말이 되는 광경인가’라며 놀랐다고 해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KBS교향악단과 함께 한 공연이었어요. 베테랑 연주자분들이 많은 곳이에요. 롤을 아시는 분이 드물죠. 어떤 분은 ‘귀가 아프다’고 하시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젊은 단원분들은 즐거운 티를 못 내기도 했어요. 의미는 있었어요. KBS교향악단은 이후에도 이런 시도를 이어갔어요. 그만큼 선례가 중요하죠. 이런 시도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시간과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Q 슬롯 잭팟 음악을 이렇게 정의해 보면 어떨까요? 말씀하신 바로크부터의 역사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설명하신 거죠. 그리고 바이올린 같은 하드웨어가 있을 거예요. 슬롯 잭팟 음악은 이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결합한 거죠.
그런데 지휘자님은 이 결합을 느슨하게 해보자는 것 같아요. 이 하드웨어들만 낼 수 있는 소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악기들로 과거의 레퍼토리만 반복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연주자들도 사실 하드웨어 장인이지, 반드시 소프트웨어 쪽 장인은 아닌 거잖아요. 이렇게 분리하면 더 과감한 변주가 가능해지죠. 지휘자님이 게임 음악을 하시는 것처럼요.
예를 들면 저는 미국 록 밴드 ‘건즈 앤 로지스’ 팬이에요. 1980년대 밴드인데, 의외로 20대 팬이 많습니다. 공연장을 가보니 그렇더라고요. 비결 중 하나가 변주 아닐까 해요. ‘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같은 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요. 새롭죠.
이렇게 콘텐츠의 변주가 많아져야 하드웨어 장인들이 활약할 수 있는 영역도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해요. 지금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묶어서 보니 스스로 역할을 제한하는 건 아닐까요?
맞는 말씀이에요. 그게 하나라고 생각해서 교육도 그렇게 해 왔어요. 그래도 나아지고 있고, 더 많이 바뀔 거예요. 5년 정도 걸릴 거예요. 지금은 제가 하는 작업을 ‘힙’하고 어린 친구들이 하는 일로 느끼는데,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일이 될 거예요. 또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사실 하드웨어 자체도 불안해질 수 있어요. AI 성능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거든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스카에 이입하던 진솔은, 이제 작품속 어른들에게 귀를 기울인다. 주인공 신지의 아버지 ‘겐도’를 비롯,작품 속어른들은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몬다. 생존 위기 속에, 아이들을 위한 정서적 공간은 찾기 어렵다. 그런 어른들에게진솔은 스스로를 봤다.그는 한예종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이제 그는 학생들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자발성을 되찾을까?’ 그런 고민을 해요.”
브리즘과 디자인그룹‘SWMA’가 협업해 제작했다. AI로 디자인, 지난해 11월 열린‘디자인코리아’에 출품했다. 진솔 지휘자가 착용한 제품은 이 제품을 바탕으로 에반게리온을 오마쥬한 것이다.애니메이션‘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요 기체인‘초호기’의 색상,퍼플과 그린 컬러를 입혔다.

